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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의 첫 희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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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보도

울릉도학술조사대장(鬱陵島學術調査隊長) 송석하(宋錫夏),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역사적(歷史的)
유적(遺跡) 울릉도(鬱陵島)를 찾어서!(1947.12.1) 국제보도연맹(國際報道聯盟), 1945~1950,
『국제보도(Pictorial Korea)』 10권(올림픽특집) 3권 1호(신년호) 1948년 1월 서울 :
International Publicity League of Korea

〔원문〕

Original Text

〔역문〕

포항에서 수로(水路) 1백24해리 동쪽 바다 속에 세상에서 저버림을 받은 것 같은 울릉도가 역사상에 나타나기는 신라 지증왕 13년(AD 512)이며 지금으로부터 1430여 년 전이다. 그 후 고려 태조 13년(930) 때에는 토민(土民) 백길(白吉) 토두(土豆) 등이 방물(方物)을 받쳤으므로 정위(正位)와 정조(正朝)벼슬을 주었다. 또 의종 11년(AD 1159)에 명주감창(溟州監倉) 김유립(金柔立)을 보내어 본 결과 촌락 기타 7개소와 석불, 철종, 석탑 등은 있으나 주민이 살기에는 불편하다고 보고하였다. 그 후 조선 태종 17년(AD 1417)에는 안무사(安撫使) 김인우(金麟雨)가 울릉도에서 대죽(大竹), 수우피(水牛皮), 면자(綿子), 검박목(檢樸木) 등을 헌상하였다고 한다. 이들 역사적 기록은 동 섬 북서편 유적지역에서 출토하는 유물로 능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세종지리지나 상식적으로 알녀진 큰대(大竹) 큰복숭아(大桃) 같은 것은 지금은 그림자조차 없고 다만 향나무가 옛날의 자취를 말하듯 절벽 위에 겨우 남아있을 따름이다. 울릉도의 사람 연기는 수차의 무인도 시대를 겪은 후 지금으로부터 64년 전에 개척민의 이주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렀는데 현존한 당시의 이주민은 겨우 한 사람이 사동(沙洞)이라는데 남아있을 따름이다. 이들의 이주 당시의 산물이든 목재는 그 후 남벌(濫伐)로 인하여 하나도 없고 전도(全島)에 있던 기이한 곽새와 바다의 특산 전복은 지금은 멸종에 가까워 이번 조사에도 발견 못했다.
울릉도에서 다시 동편으로 48해리를 가면 요즘 각광을 받은 독섬(獨島)이 있다. 동서 독섬으로 되어 서쪽 섬이 좀 커서 고도 157미터이며 서도는 분화구가 있으나 지금은 막혀서 그 하부에는 바다물이 들락날락한다. 두 섬의 사이에는 함몰한 잔해가 남아있어 이 잔해를 이번 조사대에서는 사자섬이라고 명명했다. 역사적으로 조선 성종 3년에서 12년(1472~1481)까지 10년간 이 섬의 문제가 비등하야 박종원(朴宗元)을 경차관(敬差官)으로 해서 우리나라 도잠자(逃潛者)를 찾으려고 한 일이 있으며 부령인(富寧人) 김한경(金漢京) 등이 가서도 도잠민(逃潛民)에 겁을 먹어 상륙 못하고 도형(圖形)만 그려왔다 한다. 소위 삼봉도(三峰島) 수람(搜覽) 문제이다. 현재 어민의 유일한 생명선적 산업은 오징어 어업이다. 7․8․9월의 석달 동안은 어민의 거의 전부인 남자는 석양만 되면 발동기선으로 바다에 나가 온 밤 동안 포획해서 아침 일찍 항구에 돌아온다.이 바다의 혜택이 전도민 1만5천의 생명을 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