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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의 첫 희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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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별보(別報) 울릉도사황(鬱陵島事況), 『황성신문』(1899.9.23)

〔원문〕

Original Text

〔역문〕

별보(別報) 울릉도 사황(事況)
◎울진 동해에 한 섬이 있으니 울릉이라. 그 부속한 소륙도(小六島) 중에 가장 우뚝한 것은 우산도, 죽도이니 대한지지(大韓地誌)에 “울릉도는 옛 우산국이라. 사방이 100리요 삼봉(三峰)이 우뚝한데 산물은 시호(柴胡), 고본(藁本), 석남(石楠) 등초(藤草), 향목(香木), 규목(槻木), 노죽(蘆竹)이요, 토성은 보리에 맞고, 옛날에 소 모양의 뿔이 없는 수수(水獸, 물짐승)가 있으니 이름은 가지(可之)요, 해조(海鳥)가 있으니 이름은 곽조(霍鳥, 깍새)라.” 섬 안에 인연(人烟, 인가)이 희소하여 국가에서 공세(公稅) 징수를 면하고 매 식년(式年)에 부근의 지방관으로 차사원(差使員)을 정송(定送, 보내는 것을 정함)하여 섬의 형편도 사찰하고 향목(香木)과 노죽(蘆竹)을 싣고 돌아와 바칠 뿐이니 계미년(1883)에 조정에서 김옥균(金玉均)을 동남제도개척사겸포경사로 임명하고 백춘배(白春培)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여 그 섬의 개척사무를 판리(辦理, 일을 판별하여 처리함)케 하였더니 다음해 갑신정변으로 인하여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그 후 무자년(1888)에 도민(島民) 서경수(徐敬秀)를 월송만호로 차정(差定, 임명)하여 그 섬의 인민(人民)을 늘리고 외국인의 수목 침벌(侵伐)하는 폐단을 막고 금지하였더니 다음 해에 서경수가 사망하여 이루지 못하였고 개국 504년(1895)에 내부에서 본 도민(島民) 배계주(裴季周)를 도감(島監)으로 임명하여 섬의 사무를 관리케 하였더니 금년 봄에 배계주가 내부에 보고하되 근자에 일본인이 다수 유입하여 수목을 작벌하고 거주민을 침요(侵擾, 침입하여 소요함)하니 정부에서 법을 정하여 방호하기를 청함에 내부에서 해관총세무사 브라운(柏卓安, J. B. Brown)에게 위탁하여 서양인 일원(一員)을 파송하여 그 섬의 형편을 조사보고하게 하였더니 그 보고의 개황이 아래와 같으니 울릉도는 육지에서 200여리 떨어져 있고 면적은 약 75방리(方里, 사방 1리)쯤이니, 섬 중에 경작하는 땅은 많지 않고 수목이 해변에서부터 산꼭대기까지 울밀(鬱密, 우거져 빽빽함)하였는데, 산의 높이는 4000영척(英尺, 영국에서 쓰는 자의 한 가지, feet)이오 해안에서(距岸) 3리 내의 수심(水深)은 6000~9600영척(英尺)이라. 거주민은 남녀 약 300명이니 수십 년 이래로 점차 선장(船匠, 배를 만드는 목수), 상인과 어부, 농부가 서로 따라와서 살아가는데 바닷물이 매우 깊어 어산(魚産)은 풍성하지 않고 다만 해채(海菜)의 운출(運出)이 매년 2천 담(擔, 질량의 단위로서 100근이 1담)에 이르고(多至) 토질은 기름져서 거름과 물을 요하지 아니하고 나무를 태운 재로 밭을 거듭 갈아서 1년에 두 차례 수확하니 봄에는 보리와 밀이오 가을에는 감자/고구마(薯)와 콩인데 지난해 수확한 바가 감자/고구마(薯) 2만 포(包), 대맥 2만 포(包), 황두(黃豆) 1만 포(包), 소맥 5천 포(包)이오. 지세(地勢)가 크게 기울어 벼는 경작하지 못하고 재목은 오래된 큰 삼나무와 각종 귀중한 과실수가 역시 많고 규목(槻木)‧향목(香木)‧백자목(柏子木)‧감탕목(甘湯木)이 생산된다. 대륙과 통상이 극소(極少)한데 왕왕히 상려(商旅)의 수입하는 물화는 식물‧연초‧포필 등 수 포(包)뿐이오 그 재출(載出)하는 물품은 해채가 많고 판목도 간혹 실어 옮기더라. 섬 가의 해구봉(海狗峯) 석벽(石壁)이 어지러이 쌓인 가운데 좁은 만(灣)이 있으니 대략 넓이가 100영척(英尺)이라. 그 만(灣)으로 일본 상선의 수입품은 쌀‧소금‧자기‧일본주‧양포(洋布)‧목면‧화유(火油, 등유)‧성냥‧우산 등 건(件)인데 토민(土民)과 더불어 교역하는 법은 물(物)로 물(物)을 바꾸고 그 수출품은 콩과 보리 외에 온 산의 재목을 난작거삭(亂斫鋸削, 잘게 자르고 크게 깎음)하여 선척에 실어 가는 자가 그 값을 주지 않고 본 섬 중에 집을 짓고 거주하는 일본인이 200여 명인데 토민(土民)을 침릉(侵凌)하여 서로 싸우는 폐가 있더라. 농민‧상민의 공세(公稅)는 원래 정함이 없고 다만 도감이 해채에는 10분의 1을 징수하고 목료(木料)에는 배 1척마다 100냥을 징수하며 일본인은 물건을 팔 때 구문(口文, 중개수수료)이 1백에서 2를 거두는 것 외에는 납세함이 없더라. 금년 9월에 내부(內部)에서 이상의 보고를 등인(等因, 서면으로 알려 준 사실에 의한다는 뜻으로 회답하는 공문의 첫머리에 쓰던 말) 외부(外部)에 조회하였더니 외부(外部)에서 주경(駐京) 일본공사에게 조회하야 섬에 잠월(潛越)한 일본인을 기한을 정해 쇄환하고 불통상구안(不通商口岸)에 밀행 매매함을 금하게 하라 하였더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